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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2

2012. 3. 11. 18:44 from 꼭봐!

철학이필요한시간강신주의인문학카운슬링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강신주 (사계절,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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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를 빼앗긴 불행한 삶  -드보르[스펙터클의 사회]

텔레비전이나 스크린의 화면, 데스크탑이나 노트북의 모니터, 나아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의 화면에 이르기 까지 각종 기기에 펼쳐지는 대중문화는 인간을 유혹한다. 유혹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시각적인 것이다. 기 드보르가 현대 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규정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스펙터클은 글자 그대로 황홀하고 매력적인 볼거리를 가리킨다. 물론 이런 볼거리들은 대중매체 속의 이미지들을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서 일종의 착시효과가 생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자연재난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전쟁이나 재난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든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에 더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결국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에 길들여짐에 따라 스펙터클사회의 거주민들은 점점 현실에 대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변하게 된다. 대중매체를 통해 표현된 설악산과 직정 등정해본 설악산의 차이, 뉴스를 통해서 드러난 정치권의 이미지와 실제 우리 삶을 죄지우지하는 정치적 권력의 차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현실 세계는 사라지고 시각적으로 특화된 이미지의 세계만 남게 된 것이다.

잃어버린 놀이를 찾아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그에 따르면 '노동'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것이고,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건물 공사장에서 모래를 나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모래를 나르는 목적은 물론 임금을 받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그들에게 모래나르기는 일종의 의무로 느껴질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모래 나르기가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즐거움은 언제 찾아올까? 그것은 주어진 장소에 있던 모래를 정해진 장소로 모조리 옮기고 임금을 받는 그 순간 일것이다. 고단한 5시간 정도의 모래나르기는 이처럼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희생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이다. 모래 나르기가 수단이라면, 임금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놀이'는 어떤가? 놀이터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고'있는 어린아이들을 보자. 그들은 뙤약볕에서도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모래를 가지고 이것저것 만들고 부수면서 환하고 경쾌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만지는 모래의 촉감 속에서 그리고 조그만 성곽을 만드는 기쁨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따. 그들에게 자신들이 만지고 있는 모래 만지기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인 셈이다.
하위징아는 소중한 교훈을 준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수단이면서 목적일 때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한 현재를 살 수 있는 반면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고만함으로 충만된 현재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가 두가지 의미로, 혹은 두가지 가지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놀이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그 자체로 향유되는 긍정되는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의 경우 처럼 미래를 위해 소비되어야 하고 견뎌야 하는 현재이다. 우리에게는 첫 번째 현재, 즉 긍정적인 현재가 필요하다. 오직 이런 현재로 충만함 삶만이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
 불행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즐거워 하는 것을 버리고, 주위의 평판이나 경제적인 이득 떄문에 노동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차선책이 존재한다. 그것은 자신의 일에서 놀이가 가진 즐거움과 창조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명심하자. 아이 때 경험 했던 놀이의 즐거움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은 그만큼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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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에... 두고 두고 되새김질 하고 싶은 구절들을 메모메모 해보았다.
생각을 할수 있는 책이 내게 필요한 책이라고 한  학생회관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매~~~~~~~~~우 좋은 책이 었다.
Posted by ♥lala :

철학이 필요한 시간 1

2012. 3. 11. 18:20 from book
철학이필요한시간강신주의인문학카운슬링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강신주 (사계절,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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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란 무엇인가 -나가르주나[중론]

만약 모든 존재를 자성(自性)을 가진 실체로 본다면 그대는 존재가 인연이 없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어떤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것이 없다                  [중론]

자성이란 불변하는 자기동일성을 나타내는 불교의 전문 용어이다. 나가르주나는 지금 두가지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불변하는 동일성이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모든 것들을 인연의 마주침으로 생긴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이 후자의 시선은 공을 깨달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없는데 어찌 나의 것이 있을 것인가, 나와 나의 소유가 없으므로 그는 나라는 의식도 없고 소유하려는 의식도 없는 자가 된다(.....)안으로나 밖으로나 나라는 생각이 없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집착은 없어질 것이다  -[중론]

나가르주나가 말한 '나'는 일상적인 의미의 '나'는 아니다. 여기서 '나'는 아트만이라고 불리는 불변하는 자아를 말한다, 유년시절의 나는 청년시절의 나와 다르고, 청년시절의 나는 분명 노년의 나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경우나 '나'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불변하는 '나'가  있을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문법적착각으로 생긴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 이것이 나가르주나가 말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없다'는 주장은 부정적으로 '내가 공하다'고 표현된다. 이 주장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나는 수많은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나에게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 인연이 있어서 내가 잠시 머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마저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은 모두 인연이 되어서 나에게 왔고, 인연이 다해서 나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나 내가 가진 것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부질없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가르주나의 핵심적인 전언이다. 이제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자. 주름진 얼굴마저도 무수한 인연의 마주침으로 만들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읅은 어부의 주름에는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면서 생긴 인연이 새겨져 있고, 나이든 농부의 주름에는 땅과 싸우면서 생긴 인연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주름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고유한 향내를 풍기는 아름다운 꽃과 같다.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인가? 인연이 다해서 사라진 젊음에 집착하느라, 인연의 새로운 마주침으로 생긴 근사한 주름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이 들어 주름진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젊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주름을 보면서 자신이 마주쳤던 수많은 인연들을 떠올리는 삶, 그것은 젊고 탱탱한 얼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사유의 의무 -아렌트[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범으로서 수배를 받고 있던 이이히만은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강제송환된다. 마침내 1961년 12월 그는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혐의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아렌트는 [뉴요커]지의 특파원으로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 재판과정을 직접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녀의 결론에 따르면, 이이히만은 악의에 가득차 있는 잔혹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이히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꺠닫지 못한 것이다.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였다.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우라 상실의 시대 -벤야민[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순간, 이산, 그리고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무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비슷비슷한 경치를 보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날, 그리고 어떤 장소에서 앞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풍경에 직면할 때가 있다. 바로 '여기 그리고 지금' 에 있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던 매혹적인 경치를 만난 것이다. 물론 몸과 마음상태, 시간, 기후, 습도, 채광, 바람의 세기 등등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진 다면 이런 황홀한 경험은 불가능할 것이다. 어느 순간 어떤 사물이나 풍경이 나를 강렬하게 매혹시킬 때, 우리는 그것이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그래서 어떤 것에서 아우라를 느끼는 순간은 동시에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모나리자가 아니어도 좋다. 주변의 작은 것에서도 아우라를 느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무더운 여름 하늘 위를 떠가는 구름에서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에서도, 아니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에서도,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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